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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동대학교 - 3.1운동 알아보기

가톨릭 관동대학교

3.1운동과 태극기

3.1운동이란?

191931일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입니다.


3.1운동의 배경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습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會社令, 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 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으로 극악한 환경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처럼 식민 통치 10년 동안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구체적으로 입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갔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경과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와 인산(因山, 국장)3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습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두었는데,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 측이 맡아, 2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1천 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했습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 대표는 3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과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습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 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울에서는 3일의 국장 당일에만 잠잠했을 뿐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화수리·정주·맹산·강서·대구·밀양·합천 등 많은 곳에서 일제에 의해 잔인한 집단학살이 저질러지고, 유관순의 참살 등이 자행되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습니다.



결과와 의의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 회수 1,542, 참가인원수 2023,089, 사망자수 7,509, 부상자 15,961, 검거자 52,770, 불 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습니다(일본 측 발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 탄생,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排英)운동인 제1<사타그라하> 운동, 이집트의 반영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극기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국기제정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던 것은 1876(고종 13) 1월이었습니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 · 일 사이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 측은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면서 트집을 잡았지만, 조선 측에서는 <국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이 일이 계기가 되어 조정에서 비로소 국기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히 논의되었고, 8289일 수신사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해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전에 이미 조정에서 대체적으로 정해진 국기 도안내용을 약간 고쳐 태극사괘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814일 고베에 도착하여 숙소건물 지붕 위에 이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입니다. 이것을 조정에서 83년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 공포했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년 문교부에 심의위원회를 설치, 음양과 사괘의 배치안을 결정,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태극기에 담긴 뜻

우리나라 국기'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四卦)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 파랑)과 양(: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 --,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합니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3.1절. 호국영령들을 기념하고 태극기 게양으로 그 위대한 뜻을 기리며 좋은 연휴보내시길 바랍니다.